사랑과 죽음의 멜랑콜리
예술과 철학-2012.12.12
우리는 모두 사랑하고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렇지만 이것에 대해 사유하고 우리의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사랑과 죽음, 이것은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다. 이것을 외면하기 보다는 우리 삶 깊숙한 곳 하나하나 그 의미를 들춰내며 음미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우리 인생 주변엔 모든 것이 사랑이야기로 이루어져있다. 노래, 드라마,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사랑이 빠지는 일이 없다. 우리는 왜 항상 이렇게 사랑을 갈구하고 항상 사랑에 빠져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그건 바로 우리가 무언가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핍된 자기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사랑을 통해 채우려는 욕망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필멸에서 불멸로 욕망하고 나아가려 한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사랑을 하고 그 불멸에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무엇일지 생각해 봐야한다. 불멸을 향한 그 욕망이 사랑이라면, 그것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로 사랑은 그저 남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돌아볼 것은 내가 정말 그 대상을 사랑했느냐 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결핍의 충족을 위해 사랑을 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상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자신의 삶의 영위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사랑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이것은 더 이상 아름답고 로맨틱한 사랑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랑이라면 음식물을 섭취하고 소화하듯이 내가 사랑한다고 하는 그 대상을 음식으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멸에 대한 욕망에 불타오르는 눈으로 먹잇감으로서만 상대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할 것이다. 사실 나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기 사랑만을 갈구하며 나를 위해 타자를 갉아먹고 있는 나를 어느 순간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될 때, 극단적인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될 때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의 자기사랑이 나쁜 것으로만 해석되지는 않는다. 극단적으로 빠져 자기의 이기적인 것만을 위한 대상의 갉아먹음이라면 이것은 사랑이라 할 수 없지만, 대상을 동일시하여 자신 안에 간직하는 것은 진정한 멜랑콜리를 일으키는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어쩌면 나르시시즘이라고 볼 수 없을 수 있다. 자신만을 위한 자기만을 위한 이런 이기적인 사랑은 에고이즘이라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반면 타자안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진정으로 그 타자를 사랑함으로 자신 안에 타자를 동일시하고 같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으로 결론을 맺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 대상을 사랑하고 나와 남이 하나가 되어 소화되는 음식과 같은 사랑이라면, 그 과정이 아플지라도 우리는 사랑의 면류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은 아플 수밖에 없다. 타자가 나에게 침입하는 것의 아픔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언제나 죽음이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끝이 있고 언젠가는 죽음이 있는 사랑 앞에 주저하게 된다. 사랑의 죽음은, 기약 없는 이별은 우리의 삶을 절망과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동일시 되어있는 나와 같이 있는 그것이 파괴되는 순간 우리는 극도의 아픔과 우리 자신의 파괴됨을 맛봐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랑 앞에 나는 항상 주저했다. 언젠가 아플, 언젠가 죽을, 언젠가 슬퍼야 하는 그 때를 생각하면 선뜻 그 사랑 앞에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프지 않은 사랑은 없고 슬프지 않은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안다.
이렇게 죽음을 동반하는 사랑 앞에서 주저하는 사람은 미래의 타자를 품을 수 없다.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그것을 남기지 못한 채 지나가는 인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동반하는 슬프고 아픈 사랑일지라도 그 사랑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고 내 안에 누군가를 품어갈 때 우리는 멜랑콜리커가 되고 미래의 타자를 품을 수 있는 성숙한 인생이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죽기 때문에 발생하는 멜랑콜리는 단순한 우울증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사랑과 죽음의 흔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멜랑콜리커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 두려움에 주저하여 인생의 아름다움을 맛보기를 포기하려던 참에 멜랑콜리는 나에게 부딪힐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사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언젠가 죽을 사랑이 두려워 그 삶을 음미하길 포기한 사람은 사랑과 죽음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것이 사랑인지 죽음인지 조차 인지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내게 찾아온 것이 사랑인지 죽음인지 모른 채 그 모든 것들을 흘려보낼 뿐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생의 하나하나 죽은 모든 것들을 다시 소생시킬 무언가가 필요하다. 지나쳐온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의미부여가 있어야 한다. 내 시선 하나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나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알아가고자 하는지,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그것을 지금 정말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것이다.
지금은 그 대답을 조금 찾은 것 같다. 아직 나는 너무나 자의식에 빠져있는, 부정적의미의 극단적인 멜랑콜리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조금씩 그것에서 벗어나 타자를 바라보고자 하는 소망이 내게 생겼다. 어쩌면 나에게 있어 아픔이되고 상처가 될지 모르는 이물질의 침투같은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소망이 생겼다. 온전한 타자 사랑은 있을 수 없다. 누구나 자기 사랑을 동반하고 타자 안의 자기를, 자기 안의 타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앞에서 주저한다면 우리는 미래의 타자를 품을 수 없을 것이고,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잃고 살게 될 것이다.
책에서는 마지막에 멜랑콜리를 이렇게 이해한다. ‘자기 내부에 잉태된 미래의 타자에게 자신의 피와 양분을 공급하면서 얻게 되는 고통, 흥분, 일렁임, 고독, 우울.’ 더 많은 사랑을 내어줄 수록 더 아프고 더 멜랑콜리해질 것이다. 우울증으로서의 멜랑콜리는 부정적일 수 있겠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파생되는 멜랑콜리는 아름답다. 자신과 동일시되지 못하는 부분의 타자를 날마다 그리워하며 천재적인 일까지 일어나는 끝없이 신비한 산물인 것이다. 결국은 자기 내부의 잉태된 미래의 타자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이기고 견디어 내는 아름다운 그 사랑을 마주하며 그리고 언젠가는 소멸할 죽음을 바라보며 하지만 그 가운데 나타날 멜랑콜리의 희망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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