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조식
경의를 바탕으로 실천하는 교육자
남명조식 (南冥曺植)
출생-사망 : 1501 ~ 1572
본관 : 창녕(昌寧)
자 : 건중(楗仲,健中)
호 : 남명(南冥)
시호 : 문정(文貞)
활동분야 : 문학
주요저서 :『남명집』
남명 조식(南冥曺植)
1501년(연산군7)~1572년(선조5)
속세의 명리와 권력의 욕망을 초탈했던 조선조의 도학자이자 사림의 영수이다. 경남 합천 출생으로, 1520년 생원 진사과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했다. 1530년 김해와 고향에 각각 산해정, 산천재를 짓고 학문에 매진하면서 후학을 양성. 사림의 영수로 떠올랐다. 은거생활을 하면서도 부패한 정치를 통렬히 비판하는 등 선비로서의 책무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남명집』,『남명학기』, 『파한잡기』 등이 있다. 남명조식은 직언도 서슴지 않던 도학의 거봉이며, 경의를 바탕으로 실천하는 사상가이자 교육자이다.
1. 시대적 배경
16세기는 사회적으로 성장한 사림과 기성 정치 세력인 훈구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 사화가 연속적으로 발생한 시기다. 한 세기에 걸쳐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귀족화한 훈구파와 사회 개혁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사림파의 격돌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정치판의 물갈이라는 절실한 시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사림과 훈구파의 격돌은 언제나 사림이 피를 흘리는 사화로 결말이 났고, 그러한 상황은 연속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진 사림인 조광조가 등장하여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위한 대개혁을 추진했지만 학문적 미성숙과 과격성 때문에 실패하게 되는데, 이 때 정권의 승자는 중종반정의 훈구세력이었다. 훈구파의 전횡에 질려서 신진 사림에 힘을 실어 주려 했던 왕도 두 세력의 대격돌 앞에서는 결국 자신의 오늘이 있게 한 훈구파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정권이 훈구파에게 넘어가면 사림은 귀향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키우면서 때를 기다리게 된다. 향촌 사회에서 때를 기다리던 사림이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 것은 중종 후반기에 이르러서이다. 남명은 1539년 39세로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유일(遺逸)로 인정받아 국가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선비가 수기(修己)하면 당연히 치인(治人)의 단계로 가서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되는 것이 상식인 그 당시에 남명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2. 생애
남명조식은 조선조 연산군7년(1501년) 6월 26일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兎洞)에서, 강직한 성품의 아버지 언형(曺彦亨정3품 승문원 판교)과 인자한 성품의 어머니 인천 이씨(국(菊)의 따님) 사이의 3남 5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5세. 부친의 문과급제로 서울 종로로 이사가 아버지에게 문자를 배움
9세. 큰 병을 앓았는데 어머니가 이를 걱정하자, 하늘이 나를 생(生)함에 반드시 할 일이 있 어서일 것이니 요절 할 일 없다고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함.
소년기. 이윤경(李潤慶), 이항(李恒), 이준경(李俊慶)등과 죽마고우로 자라면서 학업을 닦았다. 아버지가 함경도 단청 군수로 있을 때 유학 경전 외 천문, 지리, 의방, 수 학, 궁마, 군진법등 다양한 재능을 익혔다.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느라 물그릇을 받 쳐 들고 밤을 꼬박 지새우기도 하였다.
20세. 생원 진사 양과의 초시에 1,2등으로 급제.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개혁을 부르짖던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대 사헌)가 죽고, 숙부인 조언경(曺諺卿이조좌량)이 멸문하며 아버지 조언형(승문원 판 교)이 좌천당하자 이를 슬퍼하고 시국을 한탄한 선생은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
22세. 충순위(忠順衛) 조수의 따님 남평 조씨와 결혼.
25세.『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송나라 말기 학자였던 허형(許衡)의 말에서 감명을 받았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이룬 일이 있어야 하고, 물러나 있으면서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 벼슬에 나아가서도 이룬 일이 없고 물러나 있으면서도 아무런 지조가 없다면, 뜻을 둔 것과 배운 것이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는 그의 결연한 각오를 읽다가 홀연히 깨달은 바 있어 다시 사서(論語, 大學, 中 庸, 孟子)와 육경(易經, 詩經, 書經, 春秋, 禮記, 樂記)에만 전념.
26세.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21년간 서울생활을 마감하고 고향 합천 삼가에 장사지 내고 3년 동안 여묘 생활을 했으며, 가난과 싸우면서 민생의 고초가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남명이 항상 민생을 잊지 못하고 염려한 것은 이때 민생의 어려움을 실제로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30세.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하여 산해정(신산서원)을 짓고 안정된 공부를 하였다. 학문 과 인격을 닦았으며 여기에 대곡 성운(大谷 成運), 청향당 이원(淸香當 李源), 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成) 등 유명한 학자들이 모여 기묘사화 이후 무너졌던 사기(士氣)를 응집시켜 재기를 도모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38세. 중종 34년 회제 이언적(晦濟 李彦迪우찬성)의 추천으로 헌릉 참봉에 임명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그 후 종부사 주부에 임명되어 이곳(산해정)을 주부동 이라 한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임명되었으나 번번이 사양.
1554년 벼슬에 나아가라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예조판서)의 권고마저 물리쳤다.
45세. 1545년 을사사화로 친구인 이림(李霖), 성우(成遇), 곽순(郭珣) 등이 죽고 모친도 사망하여 3년 동안 시묘 생활을 하였으며 18년 동안의 김해 생활을 마감.
48세. 고향 합천 삼가로 다시 돌아와 계부당과 뇌룡정을 짓고 후진을 가르치면서, 한편으 로는 처사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직접 국왕에게 잘못된 국정을 호되게 비판하였다.
이때 학문과 인격 그리고 사상과 정신은 널리 알려져서 오건(吳建), 정인홍(鄭仁弘) 등 기성학자들이 남명문하에 들어와 남명을 사림의 으뜸가는 스승으로 추대하였다.
55세. 1555년 단성 현감에 제수 되었는데 현감 직을 받는 대신 온 나라를 진동시킨 상 소문 단성소(丹城疎)를 올리자 선생의 명망은 극치에 달했다.
60세. 남명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회령포 만호(萬戶) 김행(金行 정사품 문관 직)에게 시집가서 두 딸을 낳았다. 그 중 작은딸을 곽월(郭越) 아들 곽재우에게 시 집 보냈다.
61세. 선생의 고향 합천 생활 22년을 마감하고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덕산의 사륜동 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배우러 온 사람들은 조종도, 김면 곽재우, 최영경, 김우옹, 정구, 정탁 ,조이천, 조수천, 조응인, 변옥희, 등이었다,
66세. 1566년 명종 임금이 5, 7, 8월 연이어 상서원 판관에 재수한다는 교지(敎旨)를 내리 자 명종과 독대(獨對)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하여 임금과 신하는 깊은 정과 믿음이 있어야 하고, 훌륭한 제왕은 신하를 친구처럼 허심탄회(虛心坦懷) 한 의견을 나누어야 하며, 백성들이 가난에 시달려 시급한 대책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11일 만 에 덕산으로 돌아왔다.
(이 당시 시국은 중종이 죽고 12살에 왕이 된 명종 임금제위 기간 내내 문정왕후의 등살에 시달려야 했고, 섭정을 놓은 뒤에도 툭하면 왕을 불러 지시하고 심지어 임금의 뺨을 때렸다고 야사는 전한다.
누이를 등에 업고 설친 윤원형(尹元衡)의 세도는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고 윤원형의 서울의 집만 해도 서울에 16채나 되었다고 하니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조정 대신들은
배 채우기에 급급했으니 임꺽정(林巨正) 같은 군도가 설치고 왜구가 들끓는 것은 정한 이치였다.)
72세 때 1572년 2월 8일 남명이 천수를 다하고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륜동에서 조용히 운명(運命)하였다. 운명 전 문병 온 노옥계, 김우옹, 정구, 하항에게 사후의 칭호를 ‘처사(處士)’로 할 것과 자기의 학문은 경의(敬義) 두 글자에 집약되는데, 이는 변함없는 진리이니 힘써 따를 것을 당부하였다.
조정에는 재물과 제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사간원 대사간의 벼슬 을 추증하고 다시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고 문정(文政)의 시호가 내려졌다.
3. 남명조식의 삶, 사상, 철학
◆ 조선을 뒤흔든 상소문
조식의 생애에서 볼 수 있듯, 남명조식은 처사(處士:조선 중기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서 은둔한 선비들을 일컫는 말)로서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남명조식은 그저 세상을 외면하는 은둔자로 물러가 있거나 나라와 민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어떤 불의를 당해도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다. 남명 조식 선생이 말하는 처사란 세상의 돌아감을 지켜보고, 올바른 도리를 밝혀서 전하고, 그 마저 어려움에 처할 때는 목숨을 내걸고 저항하는 도리를 밝히고, 도덕을 전파하고, 인간의 올바른 도리를 수련하는 사도와 같은 것이다. 현실정치를 비판하고 역사문화를 추동하는 주체로서의 선비로 살아온 남명 조식 선생은 지리산 아래에서 은거 했던 선비지만 조선을 뒤흔든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단성소」(「을묘사직소」)
남명(南冥)의 상소문(上疏文) - 丹城疏(단성소,1555년 을묘사직소)
1555년(명종10년) 쉰다섯살이 된 남명에게 임금이 다시 벼슬을 내렸다. 이번에는 사양하지 못하도록 바로 인접 고을인 단성현의 현감에 제수하였다. 하지만, 南冥(남명)은 단성현감(丹城縣監)의 사직소와 함께 군신간의 절대적인 분별이 엄수되던 시대에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놀랍고 두려운 극언을 왕에게 올렸다. 「단성소丹城疏」는 조정의 중신들을 놀라게 하고, 사림까지 겁에 질려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殿下(전하)의 國事(국사)가 그릇된지 이미 오랩니다.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百姓(백성)들의 마음 또한 이미 殿下(전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비유컨대 큰 나무가 百年(백년)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에게 파 먹혀 진이 빠지고 말라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 暴風雨(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危險(위험)한 狀態 (상태)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實情(실정)에 있은 지가 오랩니다.
小官(소관)들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며 酒色(주색)이나 즐기고 大官(대관)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오직 賂物(뇌물)을 긁어모으는 데 血眼(혈안)입니다.
뿐만 아니 오라 內臣(내신)들은 派黨(파당)을 세워 宮中(궁중)의 王權(왕권)을 籠絡(농락)하고 外臣(외신)들은 鄕里(향리)에서 百姓(백성)들을 搾取(착취)하여 이리떼처럼 날뛰면서 가죽이 다 닳아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理致(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臣(신)은 깊이 生覺(생각)해 보면 嘆息(탄식)만 길게 나올 뿐, 낮이면 하늘을 우러러 보기 數次例(수차례)였고, 눈물과 한숨을 누를 길 없어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한지가 오랩니다.
나라가 이 地境(지경)이고 보면, 慈殿大妃(자전대비)는 바깥 消息(소식)이 막힌 깊은 宮闕(궁궐)안의 한 寡婦(과부)에 지나지 않고 殿下(전하)는 나이 어린 先王(선왕)의 한 외로운 子息(자식)-고아(孤兒)일 뿐입니다.
저 많은 天災(천재), 천갈래 만갈래로 흩어진 民心(민심)을 무엇으로 막고, 어떻게 收拾(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
이런 때를 當(당)해서 비록 재주가 周公(주공)과 召公(소공)을 兼(겸)하여 三공의 位置(위치)에 있다 해도 손을 쓰기 어려운 形便(형편)이 온데, 하물며 微臣(미신)과 같이 아무 힘도 없는 者(자)야 더 말해 무엇하리이까 ?
위로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조금이나마 부지할 수 없을 것이며, 아래로 터럭만큼도 百姓(백성)들을 救濟(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殿下(전하)의 臣下(신하)되기 또한 어렵지 않습니까.
秋毫(추호)라도 헛된 이름을 팔아 殿下(전하)의 벼슬을 도적질 해서 그 祿(녹)만 먹고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그런 臣下(신하)가 되는 것을 臣(신)은 願(원)하지 않습니다.
近者(근자)에 변방에 일이 있어 여러 大臣(대신)들이 밥도 제때에 먹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臣(신)은 이것을 異常(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찍이 20년 前(전)부터 이 일이 생겼던 것을 殿下(전하)의 靈明(영명) 하심에 힘입어 이제야 발각된 것이요, 하루 아침에 된 것은 아닙니다.
平素(평소) 朝廷(조정)에서는 賣官買職(매관매직)을 하고, 財物(재물)을 收奪(수탈)하기에 血眼(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民心(민심)이 흩어져 結局(결국)쓸 만한 將帥(장수)도 없게 되고 城(성)안에 兵士(병사) 한 사람 남아 있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敵(적)이 無人地境(무인지경)으로 쳐들어온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것은 하찮은 피부병에 지나지 않고. 마음과 속의 병은 이보다 더 심각합니다.
國事(국사)를 정돈하는 요결은 구구한 政令(정령)에 있지 않고, 오직 殿下(전하)께서 한번 크게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오나 殿下(전하)께서는 홀로 殿下(전하)가 하시려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시지를 못합니다.
學問(학문)을 좋아하십니까 ? 聲色(성색)을 좋아하십니까 ? 弓馬(궁마)를 좋아하십니까 ?
君子(군자)를 좋아하십니까 ? 小人(소인)을 좋아하십니까 ?
그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이냐에 國家(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殿下(전하)께서 활연히 깨달으시어 분연히 學文(학문)에 진력 하사 明德(명덕).新民(신민)의 道(도)를 얻으신다면 거기에 萬善(만선)이 具在(구재)해 있어 百(백)가지 應變策(응변책)이 연이어 나올 것이니 그것으로 措置(조치) 하신다면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百姓(백성)을 平和(평화)롭게 危機(위기)를 平安(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0년 동안 4번의 사화가 있는 말 한 마디의 잘못도 조심스러운 때에 조식의 직언은 칼날과 같았다. 남명 조식 선생은 처사로서 자신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현실 문제를 비판하며 잘못된 점을 꼬집었고, 강직하게 나라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기여하였다. 직접 정계에는 나아가지 않았지만, 남명 조식만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이뤄 진정한 선비로 살아간 것이다.
◆ 실천하는 지성
남명이 벼슬에 나가지 않은 까닭에 자칫 그의 학문이 현실과 관계없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오히려 남명은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닌, 현실에 쓰일 수 있는 학문을 하였으므로, 당시 공리공론의 경향을 보인 이론 위주의 성리학을 경계하였다.
-선조수정실록 5년 임신(1572,융경 6)
1월1일 (무오)
처사 조식의 졸기
조식의 학문은 마음으로 도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고 치용(致用)과 실천을 앞세웠다. 시비를 강론하거나 변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학도를 위하여 경서를 풀이해 준 것은 없고, 다만 자신에게서 돌이켜 구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하였다. 그 정신과 기풍이 사람을 격려하고 움직이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를 따라 배우는 자들이 공부가 열리는 일이 많았다.
◆ 퇴계 이황 / 남명 조식
퇴계이황 남명조식 경상좌도 경상우도 인 의 이론 실천 도문학 존덕성 이기심성론 경·의 이단배격 도교,불교 원용 관직 거부하지 않음 처사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같은 경상도에서 같은 해(1501)에 태어났다. 퇴계는 경상좌도에서 태어나 인(仁)을 사랑했고, 남명은 경상우도에 태어나 의(義)를 사랑했다. 퇴계 이황이 '인(仁)' 곧 어짐을 받드는 학문을 했다면, 조식은 '의(義)' 곧 의로움을 받드는 학문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퇴계는 왜 심성 수양을 해야 하는가를 따지는 이론을 중시했다.
남명은 “주자 이후에 꼭 저술을 남길 필요가 없다.”고 해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퇴계는 도문학(道問學)을 강조했다.
(도문학: 학문을 통하여 선한 덕성을 배양하는 방법.
주희의 입장/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기 위해 독서·강론에 의한 지혜의 확장이 가장 기초적이며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명은 존덕성(尊德性)을 강조했다.
(존덕성: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선한 덕성을 존숭하여 그것을 보존·확충하는 방법.
육구연/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고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해 진리를 선험적 양심에서 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퇴계는 이기심성론에 대한 열띤 연구와 토론을 하였다.
남명은 이기를 논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마음에 사욕이 침노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칼로 잘라내고, 정신을 늘 깨어 있게 하기 위해 경의검, 성성자 차고 다녔다.(경·의)
-퇴계는 이단을 배격하는 데에는 혹독하였다.
남명은 정신 수양에 필요하다면 비록 도교와 불교일지라도 원용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가졌다.
-퇴계는 사림이 정치 주체가 되어가려는 당시의 정국이라면 나가서 한 번 해볼만 하다고 생각하였 다. 또한 벼슬살이를 하며 우찬성에 양관 대제학까지 지냈다.
남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설치는 권신정치시대에 나간들 자기의 뜻을 펼 수 없다고 보 았다. 남명은 처사의 길을 택하였다.
남명은 당시 퇴계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 성리학을 이론화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찬성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실천에 바탕을 둔 학문을 강조하였다. 퇴계와 같이 자기 학문의 체계를 이룬 대학자라면 별 폐단이 없겠지만, 퇴계에게 배우거나 퇴계를 좋아하는 젊은 학자들 가운데 자기의 공부가 완전한 궤도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론적 논쟁을 일삼는 일이 빈번해진 것을 남명은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서로 배척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퇴계와 남명은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서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서신을 주고받으며 은근히 비판하기도 하고 서로 존중하며 존경하였다.
◆ 학문의 신조 - 경·의
남명은 자신의 학문과 처신의 지표로 경(敬)과 의(義)를 내걸게 되었다. 경과 의는 본래 ≪주역≫에 나오는 “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 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경은 마음의 주재자이고, 의는 모든 행동의 올바른 기준이 된다. 경과 의가 갖추어진 뒤에라야 마음이 맑아져서 모든 판단이 바르게 되고 참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星星子)라는 방울을, 의의 상징으로 칼을 차고 다녔다. 경의를 행동화하고자 하여 남명은 자신이 차고 다니던 칼에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명(銘)을 새겼다.”
성성자 경의검
성성자의 소리로 늘 깨어있기를 바랐고, 잠시도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또한 사심이 생기면 베어버리고자 하여 경의검을 차고 다녔다. 그리고 산천재를 짓고는 왼쪽 창문에 ‘경’자를 써붙이고 오른쪽 창문에 ‘의’ 자를 써 붙였다.
남명 조식 선생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경·의의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우리 집에 이 경(敬)·의(義) 두 글자가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다. 이 두 글자의 의미는 만고의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것이다. 성현들이 남긴 많은 말씀들의 귀결처는 결국 이 두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공부를 한다면서 경을 위주로 하지 않는다면 거짓된 것이다. 흩어진 마음을 수습하는 것이 바로 경을 위주로 하는 공부이다.”
남명은 나중에 숨을 거둘 때에도 경(敬)·의(義)를 말하였다.
“이 두 글자는 매우 절실하고 중요한 것이다. 배우는 이들이 이 공부에 익숙해진다면 가슴속에 한 가지도 걸리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서 죽게 되는 구나.”
남명은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을 하였지,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한 것이 아니었다. 도덕적 인격의 확실한 완성이 남명 학문의 궁극적 목표였고, 그 바탕 위에서 쓰이고자 하였는데, 바로 경(敬)·의(義) 두 글자에서 올바른 길을 찾았던 것이다.
◆ 지리산-『유두류록』
권력에는 한 줌 욕심이 없었으나, 지리산에 대한 남명의 사랑은 지극했다. 지금도 오르기 쉽지 않은 지리산을 살아생전 열 두 번이나 오른 것이다. 61세, 더 이상 지리산을 오를 수 없는 나이가 되자, 남명은 아예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자신의 마지막을 지리산과 함께 한다.
『유두류록』: 1558년, 조식이 지리산 12번째 오른 후 쓴 기행문으로, 자신이 살던 합천의 삼가를 떠나 진주, 사천을 거쳐 남해를 따라 섬진강 뱃길로 지리산 초입인 악양까지 갔다. 거기서부터 쌍계사, 불일폭포, 신응사까지 지리산 일대 주변 지역까지 아우르는 16일간의 일정이었다.
경상남도 합천 삼가에 있는 뇌룡정((雷龍亭). 남명의 지리산 생활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남명의 나이 마흔 여덟, 김해의 처가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운 집이다.
남명은 1558년 음력 4월 11일 출발하는데, 진주목사 김홍, 고령현감 이희안, 청주목사 이정, 그리고 이공량 등 절친한 선비 네 명이 남명과 함께 길을 떠났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도착한 곳은 하동땅. 밤새 동풍이 불어 일행을 태운 배는 돛을 달아 이곳에 닿았다.
여행 닷새째. 배는 섬진강변에 있는 삽암을 지났다. 그곳은 한유한의 옛집이 있던 곳이다.
남명은 이곳을 지나며 한유한의 삶을 떠올린다. 한유한은 고려때 사람으로 무신 집권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가족들을 데리고 이 지리산으로 들어온다. 그후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지만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이곳이 녹사 한유한의 옛집이다. 한유한은 장차 고려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처자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살았다." - 유두류록, 조식
유람 엿새째. 남명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또 한 명의 인물을 찾아나섰다.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있는 악양정(岳陽亭). 영남 사림파의 중심 인물로 큰 학문을 이룬 유학자 정여창의 옛집이다.
"정여창 선생은 함양 출신의 유종(儒宗)이다.
처자를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으나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 유두류록, 조식
부조리한 시대에 맞선 두 인물에게서 남명은 자신의 모습을 봤고 처사로서의 삶을 다잡았던 것이다.
여행 아흐렛째. 쌍계사를 지나 불일폭포를 올라갔다. 등산길이 험해서 열걸음에 한 번 쉬고 열걸음에 아홉번을 돌아보며 오른 불일폭포. 지리산이 품은 최고의 비경 중에 하나다.
"바람소리, 우레 같은 물소리가 서로 뒤엉켜 아우성치고 마치 하늘과 땅이 열리는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문득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었다. 이곳에는 신선의 무리가 살고 있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는지 모르겠다.”
남명은 이곳에서 마치 신선 세계에 온 느낌을 받은 것이다.
여행 열흘째. 남명 일행은 지금의 의신마을에 있던 신응사에 도착한다. 넘친 계곡물로 천왕봉 등반이 어렵자 남명 일행은 등반을 미루고 신응사에서 사흘을 보낸 뒤 그대로 하산한다.
여행 막바지, 남명은 진주로 돌아오는 길에 경남 하동에 삼장마을에 들렀다. 마을 출신 조지서가 생원, 문과 등 과거에 연이어 세 번 급제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삼장이다. 조지서는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을 지녔는데 연산군이 왕의 자질이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지리산에 은거했다. 그러나 갑자사화때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참수되었다.
조지서가 죽자, 그의 아내 정씨는 두아들을 데리고 절개를 지켰다.
남명은 조지서와 함께 정여창, 한유한을 높이 평가하며 이번 여행에서 세 군자를 만난 것이 무엇보다 큰 소득이라고 했다.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세 군자는 십 층 봉우리에 옥 하나를 얹은 격이요 천이랑 물결 위에 둥근 달 하나가 비치는 격이다." - 유두류록, 조식
남명조식은 세 사람이 어떻게 살다갔던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통해 역사적 인식을 더욱 명확하게 하고 또 자신이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고 했던 것 같다. 산수유람에 대한 남명의 기본 관점은 사람과 세상을 읽고, 다시 역사를 생각하는 자세, 바로 그것이었다.
4. 영향
① 임진왜란- 의병장 배출
남명은 예순아홉 살 때 (1569), 남해안에 왜적의 침입이 잦은 것을 우려하여 어떤 일에 대해 방안을 제시하는 책제(策題)라는 형식의 글을 지어 제자들을 시험하였다. 이 글은 국방에 대한 제자들의 식견을 알아보며 아울러 제자들에게 국방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한 것으로, 남명이 국방에 기울인 관심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남명의 제자 가운데 의병활동을 한 인물이 많았던 것도 남명의 이런 생각과 가르침에서 나왔던 것이다.
“(전략) 우리 나라에는 결국 사람이 없는 셈이고 왜적들은 사람 없는 곳을 들어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가 업신여김을 당하고 곤욕을 치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중략) 왜적을 막아낼 방책이 없겠는가? 제군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남명은 처사로서 지리산 속에 살면서도 국가와 백성들에 대해서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남해안에 출몰하여 자주 난을 일으킨 왜적을 물리칠 방안을 꼼꼼하게 생각했고, 제자들에게도 이 문제를 해결할 대응책을 제출하도록 요구하여 국방의식을 미리 고취시키고,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도록 하였다.
후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명의 제자들 가운데 망우당 곽재우·내암 정인홍· 죽유 오운· 송암 김면 ·대소헌 조종도· 송암 이로 등은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곽재우는 10일도 안되어서 경상남도에서 의병을 모았는데, 기록을 보면 조식이 곽재우에게 직접 병서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조식이 무예병학에 있어서 상당한 지식이 갖추어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또한 약포 정탁· 백곡 정곤수 등은 조정의 중신으로서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남명이 제자를 양성한 효과가 이렇게 국가를 위해 발휘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활동한 대부분의 의병장은 남명 문인들이다. 국가의 운명을 미리 생각하는 남명의 정신이 아니었더라면,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훗날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에는 의병이 이만큼 많이 일어나지 않았다. 국가의 어려움이 항상 의병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그 준비와 교육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선견지명이 있는 한 사람의 뛰어난 인물에 의해서 국가 민족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진주성전투
진주성전투는 영·호남의 연합이 이루어졌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전쟁 전부터 영·호남 선비들의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조식이 있었다. 호남에서 온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신응사 계곡에서 날이 저물도록 어울렸으며, 호남의 학자 기대승 일행 11명과 함께 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 모든 것을 이어주는 것은 지리산이었을 것이다. 지리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호남의 선비와 많이 만나고 교류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류가 이루어짐으로 진주성 전투 당시 영·호남의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5. 한계
남명학은 왜 후세에 왜곡 폄하됐는가
1623년, 영의정이었던 정인홍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가 집권하자 보수파 서인들에 의해 온갖 모함을 받고 여든 아홉의 나이로 참형을 당한다. 광해군 당시 개혁으로부터 소외당했던 서인들의 분풀이었다. 정인홍이 무참히 희생되자 남명학은 위축되기 시작했고, 나아가 의도적인 왜곡과 폄하가 자행되었다. 서인 세력은 이후 노론 외척세력으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개혁세력을 탄압했고, 이같은 상황에서 남명 조식의 사상이 제대로 평가를 받을 리 만무했다. 결국 인조반정 이후의 역사 왜곡이 남명학 왜곡의 주범이었던 것이다.
정인홍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벼슬에 별다른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했다. 남명 조식의 문하에 들어가 더욱 학문을 닦고, 스승 조식이 죽은 다음 해인 1573년, 행실이 바른 선비라 하여 조정에 천거되었다. 서른아홉의 늦은 나이에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이후 벼슬자리와 고향을 오가며 벼슬아치들의 당쟁과 부정부패를 질타하는 격렬한 상소를 수시로 올렸다. 임진왜란 때엔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에게 적들이 생겨난 것이다. 특히 서인들에게 눈의 가시였으며,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곧바로 정인홍을 제거하였다. 남명학 왜곡과 폄하는 이처럼 수제자 정인홍에 대한 의도적인 사실 왜곡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 밖에 남명학 왜곡의 또 다른 배경으로 남명이 상소문을 통해 수시로 왕가와 중앙 훈척들을 질타함으로써 많은 적들이 생겨난 점, 남명이 너무 고상하고 신기한 행동을 즐겨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제대로 평가 하려 하지 않았던 퇴계 이황 제자들의 시각, 남명의 문집이 여러 차례 개수되면서 남명학의 전모가 많이 사라진 점 등을 들 수 있다.
6. 평가
남명 조식은 경·의를 바탕으로 실천하는 교육자이다.
남명의 정신과 교육은 지금 이 시대의 학업과 교육의 목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남명처럼 평생 벼슬하지 않고 지냈던 도의지우 대곡 성운에게 보낸 「이름 없는 꽃」(無石花) 이라는 시는 이러하다.
한 해의 생장과 소멸을 한참 맡아왔지만,
이름과 향기는 묻혔기에 세상에선 모른다오.
이름과 향기는 본디 자신에게 누만 될 뿐.
서울에서 일찍이 몇 사람이나 돌아올 수 있었던가?
이 시는 세상 사람들이 출세욕에 사로잡혀 출처의 대절은 돌아보지 않고 한 번 벼슬에 나갔다 하면 물러날 줄 모르는 처사를 개탄하며 자기의 마음을 알아줄 친구 대곡에게 보낸 것이다. 이름은 실체의 껍데기이고, 향기는 열매를 맺기 위한 냄새일 뿐이다. 사람의 명예와 외면은 그 사람의 본질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그것을 추구하기에 급급하다. 정사·시비를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고 날뛰는 사람들이 한심해 탄식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본질이 아닌 것에 집중하며 출세만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지금 이 시대 또한 사람들이 왜 공부하며, 교육자들은 왜 교육하는지 다시 한 번 고찰해보아야 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벼슬자리 하나 차지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지만, 남명 조식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자기가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했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정치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가 국가와 백성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교육과 사상이 있었기에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사상과 교육이 이 시대에 사라진다면, 어느 누구도 국가의 위기에 발 벗고 나설 이가 없을 것이다.
※질문
Q. 임진왜란 당시 남명조식의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많이 일어났는데, 무엇이 이렇게 많은 의병장을 배출하게 한 것일까요? (질문자: 행정학과 서주현)
A. 남명조식의 교육이 수많은 의병들을 배출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교육자인 남명조식 선생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왜구의 잦은 침략에 대해 염려하였고 이에 대한 대비책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그 필요성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기에 왜구 침략에 준비하고 교육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를 후학들에게 가르치고 스스로 그 대안을 생각해보도록 한 것입니다. 후학들에게 자신이 느낀 필요성에 대해 알리고 같이 고민할 수 있도록 의견을 묻고 서로 공유하였습니다. 일방적인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그 필요성을 깨닫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주인의식과 책임의식이 고취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학문과 공리공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질적 대비책이었기 때문에, 또한 남명조식 선생의 병법의 가르침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명조식의 실천적 삶과 교육이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제자들이 남명조식을 따르고 그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던 이유는, 조식이 그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즉, 남명조식 선생님은 경과 의를 바탕으로 실천하는 교육자였기 때문입니다. 성성자와 경의검을 그저 보이기 위해 혹은 형식적으로 차고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경의검에 적혀있는 ‘외단자의: 밖으로 행동을 결단한다’를 몸소 보이셨습니다. 선비가 책만 읽고 실천을 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고 현실을 바라보고 실천해야함을 조식 선생을 통해 보았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수많은 남명의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명 조식의 교육방법을 조금 더 심도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남명은 아무런 목표도 없이 글귀나 해석하고 마는 세속의 선비들과는 가르치는 방법부터 달랐습니다. 제자들을 늘 격려하여 스스로 분발해서 공부하도록 인도했는데, 특히 의리와 이익을 뚜렷이 구별하여 그들의 기질을 청렴 강직하게 이끌었습니다. 남명은 자신의 교육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배우는 사람들의 몽롱한 정신 상태를 깨우쳐, 배우는 이의 눈을 뜨게 할 뿐이다. 배우는 사람이 눈을 뜨게 되면 천지 만물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게 된다. 사색하는 공부는 밤에 더욱 오로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은 잠을 많이 자서는 안 된다. 학문을 하는 목적은 낱낱의 지식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식견을 높이는 데 있다. (중략) 오늘날 학문의 폐단은 자신에게 절실한 일들은 버려두고 고상한 것만 추구하고 실천에 힘쓰지 않는 점이다. 성현의 학문도 그 근본은 일상생활의 평범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인 공부는 버려두고서 갑자기 성리학의 심오한 이치를 공부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략)
남명은 교훈적인 말로 배우는 사람들을 일깨웠습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증세에 맞추어 다르게 처방을 쓰듯 배우는 사람의 기질, 성격, 나이, 환경, 취향 등에 따라 그 가르치는 방법을 달리하였습니다.
이렇듯 남명 조식의 깨어있는 시대정신과, 이를 후학들에게 전달한 교육방법, 직접 실천하는 교육자로서 모범이 된 것, 모든 것들이 임진왜란 후 남명의 문하에서 의병장들을 대거 배출하게 하였습니다. 경·의를 바탕으로 실천하는 교육자인 남명조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참고문헌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선비』, 현암사, 2002
정옥자 금장태 이광표 외,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 효형출판, 1998
허권수,『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실천의 사상가 남명 조식과의 만남 』, 한길사, 2001
허권수, 『남명 조식』, 지식산업사, 2001
김충열, 『남명 조식의 학문과 선비 정신』 , 예문서원, 2006
한국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DB
KBS 역사스페셜 「책을 뚫고 현실로 나아가라, 남명조식」
사단법인 남명학 연구원 http://nammyu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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