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롬의 '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
문장 하나하나 기억하고 싶어 읽으며 정리해두었다.
프롤로그
이 열 명의 내담자와의 치료에서 내가 가진 근본적인 임상적 가설- 나의 치료기법이 근거를 둔 가설-은 근본적 불안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실존 속에 이미 "주어진(givens)" 삶 속의 모진 사실(facts)에 직면하려는 노력으로부터 떠오른다는 것이다.
실존에는 이미 존재하는 네 가지 사실들이 심리치료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우리 모두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 모두가 불가피하게 죽는다는 사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대로 우리 삶을 만들어야 할 자유, 궁극적으로는 혼자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분명한 삶의 의미나 의식(sense)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나는 열 사람의 이야기를 통하여 실존의 진실에 직면하여 개인적인 변화와 성장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인간의 핵심에는 존재를 지속시키고 싶은 소망과 죽음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인식(awareness)사이에 갈등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죽음
죽음에 대해서 알고, 다시 말해 지적으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우리를 압도할 불안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죽음과 관련된 공포를 완전히 분리, 혹은 해리시켜 의식되지 않은 부분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리 과정은 무의식적이고 우리에게 보이지 않지만 드문 경우나마 그 부정(denial)의 기제가 실패하여 죽음에 대한 불안이 온전한 힘을 가지고 밀려올 때 우리는 실존의 그 사실들을 확신할 수 있다.
악몽- 죽음에 대한 생생한 불안이 수문장을 제치고 도망쳐서는 의식 위로 폭발해 나온 것이다.
죽음이 임박한 암 환자들과의 여러 해에 걸친 작업 -> 안전감을 주는 두 가지 신념
- 개인적으로 특별하다(personal specialness)
자신이 불사신이고 침범할 수 없는 존재- 보통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법칙과 숙명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믿음.
- 궁극적인 구원자에 대한 신념(belief in an ultimate rescuer)
위기의 순간에 우리 삶을 항상 제자리로 되돌려 놓아줄 전능한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 믿는 것
우리들 대부분은 죽음의 그림자를 불안하게 피하며 편안히 살아간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충분한 인식은 우리에게 지혜의 열매를 맺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한다.
비록 죽음이라는 사실(fact)은 육체적으로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idea)은 우리를 구원한다
자유, 책임
주어진 자유라는 것은 죽음과 정반대가 되는 주제이다. 죽음은 우리가 두려워 하지만, 자유는 대체로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존적인 입장에서 보면 매일 경험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위대하게 디자인된 우주 속에 영원히 들어가 있지 않고, 궁극적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므로 자유는 불안과 결합된다. 자유란 자신의 선택, 행위, 삶의 상황에 대하여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미이다.
책임이 있다(responsible) _ 사르트르(Sartre) 각자가 자기 삶이라는 디자인에 "작가"(be the author of)가 되는 것
어떤 치료자든, 치료의 결정적인 첫 단계는 내담자가 자기 삶의 명제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가설을 갖는 것
어떤 사람의 문제가 바깥에 있는 어떤 힘 혹은 동인(agent)으로 인한 것이라고 믿는 한, 치료는 아무 효과가 없다. 만약, 종국적으로, 문제가 바깥에 있는 무엇에 있다면 왜 자신이 변화해야 하는가? 변해야- 혹은 바뀌어야 하는 것은 외부 세계(친구들, 직장, 배우자)이다.
내담자들은 책임에 대해 저항을 하기 때문에 치료자는 어떻게 스스로 자기 문제를 만들어 가는지 내담자가 인식하도록 도울 기법을 발전시켜야 한다. 내가 사용하는 강력한 기법 하나는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내담자들은 치료 바깥 삶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치료 장면에서 재창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의 과거나 현재 삶에서의 사건보다는 바로 이 순간 내담자와 나와의 관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치료관계(혹은, 집단치료에서라면 집단원들간의 관계)의 세세한 부분을 검토함으로써, 그 내담자가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지적해낼 수 있다.
책임에 대한 가설이 내담자에게 변화를 일어나게 하는 시발점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변화와 동의어는 아니다. 치료자가 통찰을, 책임을 그리고 자아실현을 아무리 촉진시켜도 항상 진정한 목표는 변화이다.
의지
자유는 삶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감내하라고 요구하지만 변화에는 의지(will)가 또한 요구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우리의 자유가 일으키는 것은 행동의 원동력, 의지를 갖게 하는 것(willing)이다. 의지를 갖는 것은 두 단계를 거친다고 본다. 즉 어떤 사람이 소망(wishing)함으로써 시작이 되어 결정(deciding)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소망이 차단되어 있는데, 그러한 이들은 자기가 무엇을 느끼는지 또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의견도 없고, 충동(impulse)도 없고, 기호(inclination)도 없이 다른 사람들의 욕망(desire)에 기생한다. 그런 사람들과 있는 것은 지루하다.
어떤 내담자들은 결정을 할 수 없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해야하는 지 정확히 알면서도, 행동할 수가 없고, 그 대신에 결정의 문 앞에서 서성거린다.
하나의 결정은 다른 대안들을 배제 혹은 제거하는 것이다(결정하다라는 decide라는 단어의 어원은 살해(homocide)혹은 자살(suicide)이라는 단어처럼, "살해(slay)"의 어원이 담겨있다).
실존적소외
실존적 소외(isolation)라는 또 하나의 명제는 자신(self)과 타인(others) 사이에 결코 연결될 수 없는 틈, 아주 만족스러운 깊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어도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간격(gap)을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타인이라는 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인간 세상을 이루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러한 소외는 대인간(interpersonal) 그리고 개인내(intrapersonal) 소외라는 두가지 형태의 소외와는 구분된다.
대인간 소외- 사람은 친밀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기술이 부족하거나 그러한 성격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 대인간 소외, 혹은 외로움(loneliness)을 경험한다.
개인내소외- 마치 어떤 사건의 기억과 정서가 분리되어 있으 ㄹ때처럼 자아의 여러 부분이 분리되어 있을 때 일어난다 .가장 극단적이고 극적인 분리형태, 즉 다중성격(multiple personality)은 비교적 드물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것이 일어났을 때 치료자는 어느 성격부분을 심각히 받아들어야 할지 당혹스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우정이나 결혼이 실패하는 까닭은, 관계를 맺고 서로 돌보는 대신, 한 사람이 상대방을 소외에 대한 방패막이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실존적 소외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 사례에서 일어났던 공통적이고, 필사적인 시도는, 혼합(fusion)인데- 자신의 자아 경계를 엷어지게 하여 다른 이의 것에 녹아버리게 하는 것이었다.
인생의 가장 큰 역설(paradox) 중 하나는 자기 인식(self-awareness)이 불안을 낳는다는 것이다. 혼합은 불안을 재빨리 일소하는데- 바로 그 자기 인식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흡수되어 버리는 축복받은 상태에 들어가 외로운 나 (I)에 대한 의문이 (그리고 소외에 대한 늘상의 불안이) 녹아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자아 되돌아보기(self-reflective)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안을 덮는 대가로 자신을 잃어버린다. 이것이 치료자들이, 사랑에 빠져있는 내담자의 치료를 좋아하지 않는 정확한 이유이다. 치료적인 작업은 자기 인식에 의문을 갖고,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불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인한 흡수(love-merger)와 치료는 양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발을 딛고 굳건히 사랑하는 것(standing in love)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사랑이란 무엇엔가 빠지는 것(falling for)이 아니고 오히려, "누군가에게 주는(giving to)" 존재의 한 방식이며 오직 한 사람에게만 향하는 행동이 아니라 크게 관계 맺는 방법인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도, 다른 이가 기꺼이 함께 있어줄 때 소외는 극복된다. "배에 혼자 타고 있다 하더라도 다른 배들의 불빛을 가까이 볼 수 있다는 건 한결 안심이 된다."
삶의 의미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피조물이다. 생물학적으로 우리 신경계는 뇌에 입력되는 자극을 자동적으로 형태(configuration)로 묶어 조직화한다. 그런데 의미라는 것은 일종의 전능감(mastery)을 준다. 패턴이 없이 무작위로 제시되는 사건 앞에서 무력하고 혼란스런 느낌을 가질 때, 우리는 거기에서 질서를 찾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에 대하여 통제가 가능하다는 기분을 갖게 된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의미가 있다는 것은 가치가 있다는 뜻이고 그리고 그 가치에 따라 행동의 규준을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왜(why)라는 의문(나는 왜 사는가?)에 답을 하면서 결국 어떻게(how)라는 의문(나는 어떻게 사는가?)에 답을 얻는다.
치료에서도, 삶에서나 마찬가지로 의미를 찾는 것은, 몰두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데서 오는 부산물이며 그것이 바로 치료자가 노력의 방향을 기울여야 하는 점이다. 즉, 삶에 몰두함으로써 의미에 대한 의문에 합리적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 의문이 문제가 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치료자들은 내담자들과 진솔한(authentic)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한 매일 하는 일에서 상당한 불확실성(uncertainty)을 경험한다. 내담자가 직면한 대답 불가능한 질문을 치료자들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경험이, 궁극적으로는 너무나도 개인적이고 타인이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불확실성을 견디는 능력은 이 전문 영역에 필수적인 선행 조건이다. 학파의 이념과 견고한 치료적 체계를 가진다면 확실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유혹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 필수적인 불확실하고 자발적인 만남(encounter)을 막아버린다. 이 만남(encounter)은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고통을 겪고 있는 두 사람간의, 관심있고(caring) 깊은 인간적 만남(meeting)이다. 치료자는 두 가지 역할을 가지고 있는데 내담자의 삶을 관찰하고 또 동시에 참여하는 것이다. 관찰자로서의 치료자는 내담자에게 꼭 필요한 기초적인 지침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객관적이어야 한다. 참여자로서의 치료자는 내담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 만남으로써 영향을 주고 때로는 변화를 불러 일으켜야 한다.
내담자의 삶에 충분히 들어가기로 결정을 했을 때, 치료자인 나 역시, 내담자가 직면한 실존적 주제와 직면할 뿐 아니라 내담자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탐색적 질문을 자신에게 하여 이를 검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토마스하디- "더 나은(the better) 길이란 최악(the worst)을 충분히 보고 나서이다"
내담자만큼이나 치료자도 이러한 실존적인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에는 너무나 필수적인, 객관성이라는 직업적 자세는 부적절하다. 그들에게 당신 그리고 당신만의 문제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대신에 우리는 우리 그리고 우리의 문제라고 말해야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 우리의 실존은 죽음과 상실로 이어지는 사랑, 두려움으로 이어지는 자유, 그리고 성장으로 인하여 분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이 점에 있어서 함께인 것이다.
#1. 사랑의 처형자 love's excutioner
나는 사랑에 빠져있는 내담자와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은 치료자는 어둠과 싸워 불빛을 찾는 것인데, 낭만적인 사랑은 신비로워야 지속이 되고 그 사랑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기루가 되어 날아가 버린다. 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가 싫다.
강박관념, 풍요로운 현실을 나의 강박적인 생각 때문에 볼 수 없음. 나의 분석에 돌입했고 몇 달간의 힘든 시간 후에 나의 마음은 나의 것이 되어 삶을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내 경험을 그녀에게로 일반화하여 그녀의 삶도 원래 풍요로운데 강박관념 때문에 그것을 놓치고 있다고 잘못 가설을 세운 것
그 정반대의 공식- 삶이 너무나 황폐하기 때문에 강봑관념을 첫 번째로 두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탐색하게 됨
치료자가 내담자와 정서적으로 연루되어서는 안되는 이유- 깊은 감정과 비밀스런 정보에 접근해 있는 치료자가 가진 역할의 특권 때문에 치료자의 반응은 항상 실제 의미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녀는 자기 삶의 구조(constitution)에 대한 자유와 책임을 부정하고자 그에게 힘을 부여하고 있다. 내담자 스스로 통찰이 뼈 속 깊이 왔을 때만 효험이 있다 .그 때에만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고 변화한다. 자신만이 자기 삶의 구조를 만든다는 것을 통찰하기란, 지독하게 어렵고, 두렵기까지 한 것이다.
늙어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녀의 강박관념에 연료를 대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그녀가 사랑과 혼돈을 하고 싶어하는,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잊고 싶어하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죽음으로 인해 사라진다는 사실을 직면하여 경험하게 될 공포로부터 도피하는 것이었다.
교만과 호기심에 빠져 애초에 델마가 심리치료에 좋은 후보가 아니라는 20년간의 증거를 무시했었고, 돌이켜보면, 거의 성공할 확률이 없었는데도, 그녀에게 고통스러운 직면을 시켜버렸다. 나는 대체할 만한 무엇을 세우지도 않고 방어체계를 벗겨내 버렸다.
#2. 만약 강간이 합법이라면 If rape were legal
이 비합리적 신념이 하고 있는 기능은 분명했다. 그가 매력적인 여성에게 사랑받게 되어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되는 한, 자기가 남들과 별로 다르지 않으며, 크게 잘못되지 않았고, 보기 흉하지도, 죽어갈 정도로 아프지도 않다는 믿음을 지지해 주는 것이다.
과거에 나는 그가 하는 부정(denial)에 손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해결보다는 문제를 더 일으키지 않는 한, 그리고 대신할 더 나은 무엇이 있지 않는 한, 방어를 파헤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그의 부정이라는 방어 체계가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도전을 할 시간이 왔다.
루스에 대한 환상은 다른 인간과 아직 자기가 접촉할 수 있고 또한 돌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나는 그와 기꺼이 관계를 맺으려는 나의 마음을, 자기 등 뒤에서 눈을 꿈벅거리기보다는, 내 방식의 접촉(touching)과 돌봄(caring)이라는 것을 그가 이해하기를 바랬다.
나는 그가 자아의 경계(personal boundaries)에 대한 조망을 잃었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의 중심이 되는 핵심을 공격받으면 결국, 그런 상황은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므로 적의를 가지고 반응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했었다. 나는 칼로스에게 자기의 핵심이 되는 자아(core self)와 다른, 주변적인 속성 혹은 활동을 변별하도록 촉진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핵심이 아닌 부분을 "동일시하지 않아야(disidentify)"하고 핵심이 아닌 부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기가 행한 것, 혹은 가치를 두는 것 등으로 나타날 수 있으나 그것이 자신, 즉 자기의 중심적 존재(central being)는 아닌 것이라고 말했었다.
칼로스는 이 구조에 혼동이 있었다. 그가 설명한 직장에서의 방어적인 성향에서 뿐 아니라 자기 신체에 대해서도 이 "동일시하지 않기(disidentification)"모델을 확산시켜 적용할 수 있다. 다시말하면, 그의 신체는 위태롭다 할지라도, 그 자신은, 그의 생생한 본질은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사람이 죽음 앞에 서는 방식은 자기 부모가 만들어 놓은 모델에 의해 크게 결정된다고 항상 느낀다.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은 어떻게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하느냐를, 스스로의 예를 통해서, 가르쳐 주는 것인데 칼로스는 품위있게 너무나 훌륭한 가르침을 주었다.
내가 그를 병원으로 방문했을 때 그는 너무나 약해서 거의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을 꼭 쥐며 자기 머리를 들어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내 삶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 뚱뚱한 여인 fat lady
심리치료자들에게 아무리 노력해서 자기 발전을 거듭해도 결코 졸업을 할 수가 없는 대표적 영역이, 역전이(countertransference)일 것이다.
심리치료자가 가진 가장 가치 있는 하나의 도구는 "과정(process)"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내용(content)과는 상반되는 과정(process)을 생각해보자. 대화를 할 때 내용은 실제 소리가 되어 나온 말, 즉 논의되고 있는 실질적인 주제이다. 그러나 과정은 그 내용이 어떻게 표현되는가와 특히 이러한 표현 방법이 그에 참여하고 있는 개인들간의 관계에 대해서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말한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내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예를 들어 베티에게 지극히 단순한 해결책을 제사하려 하기를 그만두는 것과 과정, 우리가 서로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관계는 두드러진 하나의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루함(boredon)이었다.
매우 지루한 여성이라는 것은 사실이고, 그녀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법으로 이러한 사실을 직면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이러한 특징들을 그녀가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나는 일반적인 전략을 결정했다. 나의 기본적 입장은 그녀에게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것인데 그녀의 행동 특성은 이것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항상 드러내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우리 둘이 나누고 있는 바로 지금의 경험에 대해 드러낼 수 없거나, 혹은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여기에서의 느낌에 대해 그녀에게 물어볼 때 언제나 하는 반응은 "괜찮다(O.K)"나 "좋다(fine)"는 회피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서 계속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남을 웃겨야 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나는, 이 사무실에서는 그 반대가 진리, 즉 나를 즐겁게 하려 할수록 점점 멀어지며 나는 관심이 점점 적어진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오토랑크 "죽음이라는 빚을 지지 않기 위해서 생명이라는 대출을 받지 않는다(Refusing the loan of life in order to avoid the debt of death"
내가 생각하기에 베티가 죽음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삶은 현재(now)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을 또한 언제까지나 미루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삶을 피해온 방식을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꺼리는 것(헤어지는 것이 무서워서), 삶에 있는 많은 것들로부터 자기를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그녀의 과식과 비만, 슬그머니 과거나 미래로 미끄러져 들어감으로써 현재 이 순간을 회피하는 것 등드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4. 잃은 아이, 남은 아이 the wrong one died
만성적인 비탄(grief)에 대한 비유로 얼었다(frozen)는 표현은 적절하다. 몸은 경직되어 있고 얼굴이 긴장(taut)되어 있으며, 얼음 덩어리 같은 반복적인 생각이 뇌 활동을 막고 있다. 페니는 얼어붙어 있었다.
내담자가 치료에 가지고 오는 첫 꿈은, 특별히 풍성하고 상세한 것이서 깊은 조명을 하게 해준다. 나는 그 꿈에 대해 주된 감정을 묘사해보라고 하였다.
바로 그 시간에 그 녀는 가족을 잃은 이들에 대한 나의 미래 작업에 기여할 개념, 즉 죽은 자와 더불어 살아 나가려면, 살아 남은 자와 살아가기를 먼저 배워야 한다는 것을 훌륭하게 가르쳐 주었다.
살아있는 자와 더 잘 살아가는 것을 배워가는 작업을 하던 다섯 번 째 삭ㄴ에 페니는 다른 형태의 의문을 제기하여 작업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우리는 초점을 바꾸었다. 우리는 페니의 아들드로가의 관계나 전남편과의 관계에서 눈을 돌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또 다른 중요한 특성인 삶의 의미를 잃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부모를 잃는다거나 일생의 친구를 잃는 것은 과거를 잃는 것이다. 죽은 사람만이 예전에 일어난 황금 같은 사건의 또 다른 증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식을 잃는 것은 미래를 잃는 것이며, 자기 삶의 장기 계획을 잃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떤 미래를 계획하며, 죽음을 어떻게 초월할 것인가? 사실, 자식은 자기의 영원한 삶의 계획이기 때문에 인생 계획을 잃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전문적으로 이야기해서, 부모를 잃는 것은 "대상의 상실(object loss)"(인간의 내적 세계를 구성할 때 도구적 역할을 하는 인물이 "대상"이다)인 반면, 자식을 잃는 것은 "미래 과제의 상실(project loss)"(사람이 인생을 이러이러하게 살아가겠다고 정한, 삶의 이유(why)와 방법(how)을 제시하는, 자기의 중심원리)인 것이다.
사람이 "뭔가 좀 더 했어야 했다"는 감정(sentiment)은, 내가 생각하기에, 통제 불가능한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소망을 반영하는 것 같다. 결국 사람이 했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아서 느끼는 죄책감이라면, 뭔가 할 수 있었던 것이 있어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는 죽음 앞에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무력감으로부터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생각인 것이다. 우리는 무한한 힘과 발전에 대한 환상에 갇혀서 적어도 중년의 위기가 올 때까지는, 실존(existence)이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따라 성공을 향하여 나선형으로 영원히 상승한다고 믿고 있다.
이런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환상은, 급박하고 되돌릴 수 없는 경험에 의해 깨지게 되는데, 철학자들은 이를 "경계선 경험(boundary experience)"이라고 하였다. 여러 가지 경계선 경험 중에서, 칼로스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코앞에 닥친 자신의 죽음보다 더 강렬하게 인간의 유한성과 우연성을 직면하게 하고 즉각적으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또 다른 경계선 경험이라면 중요한 타인-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 혹은 친구-의 죽음을 들 수 있을 것인데 이것 또한 자신의 불사신 환상을 깨지게 한다. 대부분의 사라들에게 있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큰 상실감은 자식을 잃을 때 온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간접적으로 자신의 죽음과도 직면하게 된다. 존 던은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신을 위해서도 울린다"쓴 바있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그렇게 부모의 시간과 에너지를 다 뺏어가 버린 죽은 형제에 대해 분노가 가득하다. 때로 그 분노는 자기 자신의 슬픔과 함께 부모의 모순을 자기 식으로 이해하며 공존한다. 이러한 조합은 살아남은 아이들에게 있어 죄책감이라는 완벽한 공식과 무가치감(worthlessness) 그리고 자기가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으로 나타난다.
남편과 아내는 다른-사실, 완전히 정반대- 방식으로 슬퍼하며 부부가 서로 이해하고 지지할 수가 없고, 한쪽의 애도 방식은 다른 쪽 배우자의 애도방식을 간섭하여 충돌과 소외의 원인이 되고 점차 별거를 하게 만든다. 많은 여성은 , 페니처럼 과거로 돌아가서 자기들의 상실감을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나서야 살아있는 자, 미래 과제들(projects) 그리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던 모든 것으로 다시 돌아와야겠다고 느낀다. 남자들은 대체로 의식적으로 억제하고 회피하는 대신 자기의 슬픔을 경험하고 나누는 것을 배워야 한다.
페니의 많은 치료적 변화가 자가 발생적이고 스스로 방향을 잡아간 것이라는 사실은 치료자에게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기억하라, 당신이 모든 작업을 다 할 수는 없다. 내담자가 무엇을 해야 했는지를 깨닫고 성장과 변화에의 욕구가 있음을 스스로 믿게 되는 데 에 만족하라."
5. 어찌 내게 이런 일이 i never thought it would happen to me
그녀가 강도를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강도는 그녀의 일상을 조명했다. 즉 그녀의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해 본적이 없다"는 개인적으로 특별하다는 믿음을 상실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특별함에 대한 비합리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는 죽음을 부정하는 주된 방법 중의 하나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보려고 자기는 공격당하지 않는다는 비합리적 신념을 가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노화나 죽음과 같은 유쾌하지 않은 일은 다른 사람들이나 당할 운명이지 나에게 닥칠 운명은 아니며 자기는 인간이고 생물이라는 숙명을 넘어서 있고, 자연의 이치를 넘어서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특별하다는 느낌- 그녀를 잘 지낼 수 있게끔 기여한 모든 자기 기만(self-deception)이 갑자기 설득력을 잃었던 것이다. 그녀는 환상으로 보호했던 모든 것들이 환상을 뚫고 나와 발가벗은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을 봤던 것이다.
그에 힘입어, 엘바는 자기 빽을 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크게 열어 젖히고 안에 든 것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특별한 순간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전에 어떤 내담자도 해 본 적 없는, 그야말로 내게 자기 전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나는 구석구석 그녀를 따라갔고 한 늙은 여성의 가방이 그토록 고독과 친밀감의 매개체가 된다는 것에 경외감을 가졌다. 즉 실존을 통합하는 절대적 고독 그리고 고독의 공포를 몰아낸 친밀감이 그 속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친밀감의 시간, 사랑,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것이 되살아났다. 그 한 시간에, 엘바는 버림받은 자에서 신뢰하는 사람으로 옮겨갔다. 그녀는 활기를 되찾았고 다시 한 번, 자기에게 친밀감의 능력이 있음을 확인했다.
6. 만만하게 굴지 말라 Do not go gentle
나는 이제, 무의식적 동기에 대한 생각으로 치료 방향을 돌리려 했다. 아내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고 믿음으로써 데이브가 얻는 이득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의 비밀에의 열정에 자양분을 주고 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남자든 여자든 성적이 아닌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 친밀에의 갈망을 일으킬까? 예순 아홉에도 그러한 갈망들을 발굴하여 소생시키고 깨닫게 할 수 있을까?
그 편지를 내가 보관함을써 데이브로 하여금 치료 종결을 어렵게 하리라는 생각은 터무니 없다는 것을 재빨리 나는 깨달았다. 교활한 수단이나 속임수로는 데이브가 다른 사람과 직접적으로 그리고 진솔하게 관계를 맺도록 도울 수가 없으며 내가 직접적이고 정직한 행동의 모범을 보여야했다.
만약 내가 그 편지를 보관한다면, 나는 그의 비밀을 지니려는 성향에 반치료적인(countertherapeutic) 방식으로 공모를 하는 것 같았다. 집단을 시작하기도 전에 다른 집단원들을 배제하고 특별한 관계를 맺어 나와 공모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한 후, 나는 결국 내 반응을 선택했다.
"그 편지들이 당신에게 왜 중요한지를 이해해요, 데이브. 그리고 당신이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나를 선택해준 것이 기뻐요. 그러나 집단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집단지도자를 포함해서, 가능한 한 개방적일수록 집단치료 작업이 잘된다는 것이 내 경험입니다. 나는 당신이 이러한 거래에 대해 집단에서 이야기를 하겠다고 동의한다면, 원하는 동안 안전한 장소에 기꺼이 그 편지를 보관해 드리겠습니다."
딜레마에 빠졌거나, 양립할 수 없는 강한 두 감정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으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딜레마나 갈등되는 두 감정을 모두 내담자와 나누는 것이다.
왜 나는 골치 아파하면서도 그 편지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왜 전부 태워버리고 편안해지지 않는 것일까? 왜 지금하지 않는가? 지금!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가슴을 꼬챙이로 찌르는 것 같다. 그러나 왜? 오래되어 누래진 편지에 대해 왜 그렇게 고통이? 나는 이에 대해 작업을 해야했다- 언젠가.
7. 두 번의 미소 two smiles
이미지와 언어간의 장벽. 생각은 이미지로 하지만, 다른 이와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이미지를 생각으로 변환한 후 다시 그 생각을 언어로 변환해야한다. 이미지에서 생각으로 그리고 언어로의 변환 진행은 신뢰롭지가 못하다. 흔히 오류가 일어난다.
보바리 부인에 대하여 플로베르가 한탄한 바
'영혼의 풍부함이 언어로 흘러나오면 김이 빠진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누구도 자기의 욕구나 생각 혹은 슬픔을 정확히 표현할 수가 없다. 인간의 말은, 별이 녹아 내리게 할 음악을 만들고 싶어하지만 결국 금이 간 그릇을 두들겨 내는 괴상한 리듬에 맞춰 곰이 춤을 추는 것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 버린다. '
그 고백의 순간에 제이에 대하여 내가 세운 구조는 깨져버렸다. 나는 그를 일 주일, 한 달, 여섯 달 전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진정한, 비밀스런 제이는 결코 몰랐던 것이다. 미래에는 또 수많은 제이들이 나타날 것이다. 결코 나는 "진정한(real)"것을 하나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번역상의 오류는 편견에 의한 오류와 섞인다. 우리는 자기가 선호하는 생각과 게슈탈트 속에 다른 이를 집어넣음으로써 왜곡하는데, 이 과정을 프루스트는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우리는 자기가 본 창조물의 물리적 형상을 이미 그에 대해 형성해 놓은 개념으로 싸서, 마음 속에서 그림으로 완성하므로, 그 개념들이 주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결국 그것들은 뺨의 굴곡과, 코의 선을 정확하게 따라가며, 완전하게 메워져, 투명한 봉투에 담긴 듯, 그의 목소리와 아주 조화롭게 섞여서, 그 얼굴이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인지하고 들은, 그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개념이 된다.'
많은 사람들은 충분한 정보가 있다면, 사람을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진단은 증상과 행동 특질의 단순한 모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을 진단적 용어와 숫자라는 범주로 요약하도록 병원, 보험회사, 정부 기관으로부터 점점 더 압력을 받는다. 정신과적 진단 범주의 가장 자유로운 체계조차도 다른 이의 존재를 침해한다. 우리가 종류를 분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면, 우리는 그 부분들, 범주를 초월하는 다른 사람의 생생한 부분들을, 분명하게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생생하게 살릴 수도 없을 것이다. 인간관계에는 다른 사람을 결코 완전하게 알지는 못할 것이라는 가설이 있는 것이다.
8. 뜯지 않은 세 통의 편지 Three Unopened Letters
계속 나아가기 전에 나는 대안들을 생각했다. 내가 너무 서두르거나, 너무 적극적인가? 나의 역전이는 어떠한가? 내가 소울에게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는 기분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아마도 이전에 했던 치료가 닳아 없어졌다는 표시같아서 내가 초조해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손상된 자만심이 소울을 더 인내심 있게 보지 못하게 하는가?
나는 내가 싸우고 있는 주제와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투쟁하고 있는 내담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오후에 산책이나 하며 어슬렁거리고픈 갈망에 대해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소울처럼, 나도 강박적으로 일을 계속했고 그 산책을 불가능하게끔 일정을 스스로 일로 가득 채워 넣었다. 나는 우리들이 총을 든, 같은 사람에게 쫓기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치게 능동적인 치료자는 내담자를 어린애가 되게 한다. 마틴 부버의 말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펼쳐 놓도록(unfold)" 이끌거나 돕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나의 옛 은사인 존 화이트혼은 치료적 관계의 특성을 가지고 정신병(psychosis)을 진단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내담자의 정신건강을 호전시킬 수 있는 치료적 동맹(allies)을 내담자와 맺고 있다는 감이 치료자에게 더 이상 오지 않는다면, 정신병적(psychotic)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다.
소울이 묵시적으로 예감했던 것은 모두 틀렸음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편지의 색조는 분명 수용적이었고, 애정에 넘치고 존경심이 가득한 것이었다. 소울은 이러한 색조를 성공적으로 접수했고 이 편지가 그의 건강에 미치는 효과는 즉각적이고 분명했다. 불길한 생물학적(biological)증후를 동반한 그의 우울증은 몇 분만에 사라졌고 이제 그는 지난 몇 주간의 자기 행동과 생각이 자아 소외와 기괴한 것이었다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는 빠르게 우리의 이전 관계를 다시 수립해나갔다.
9. 측은해지려고 태어나다 Therapeutic Monogamy
그러한 장황한 설명이 우울증을 야기시키는(depression-spawned)전략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그것은 그녀의 우울증이 하는 이야기였는데, 다음 회기 때까지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그건 당신의 우울증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지, 당신이 아니고요. 언제나 우울증에 빠질 때 당신은 다시 올라오곤 했지요. 우울증에 있어서 유일하게 조은 점은 항상 끝이 난다는 점이지요." 나는 책상 쪽으로 걸어가, 그녀의 파일을 열고, 바로 삼 주 전 그녀가 삶에 대해 희열을 느끼며 내게 썼던 편지의 일부를 큰소리로 읽었다.
치료자로서의 나의 임무는 나의 기능을 적어지게 하는 것으로서 내담자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엄마가 되고 아버지가 되도록 돕는 것이다. 그녀가 나아지게 하는 역할을 내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자기를 나아지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책임감을 갖도록 돕고 싶었고, 가능하면 진전의 과정이 그녀에게 분명해지게 하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가 "어느 정도"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내가 불편했던 이유였으므로 그것을 탐색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정확하게 무엇이, 지난시간에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어요?" "어느 순간에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지요? 우리 함께 그것을 역 추적해 가봅시다."
그러나 그건 단지 말뿐이었어요. 이번엔 좀 달랐는데, 당신은 말 이상(beyond words)으로 했어요.
말 이상으로 한 것, 그것을 높이 평가해 계산해 준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내가 했던(did)것이지, 말한(said)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이 내담자를 위해 실제로 해준 무엇인가였다. 아내에 관해 무엇인가를 나눈 것(sharing)이, 마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준 것, 그녀에게 선물을 준 것이었다. 치료적 이야기(words)가 아니라 치료적인 행위(act)!
마지와 함께 작업을 한 지난 해 동안, 나는 내 작업에 단 하나의 진정한 원칙- 그녀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동정(pity)하거나, 대상화(objectify)하지 않고, 우리 사이에 평등이라는 기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나는 내 능력껏 최선을 다해 그 원칙을 따랐고, 이제 그것이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좋았다.
전에는 그녀가 그렇게 해리된(split off)적이 없었다. 내가 가진 한 가지 기본원칙인 "마지를 평등한 인간으로서 치료하라"는 더이상 충분치 않았다. 내가 마지와의 관계를 보호하고 그에 충실하게 남아있을 수 없는 한, 치료에의 희망을 잃는다. "내담자를 동등한 자로서 치료하라"는 나의 기본 원칙을, "내담자에게 충실하라(be faithful)"로 수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또 다른 마지에게 유혹 당하도록 자신을 허용해서는 안되었다.
충실하라(fidelity), 만약 내가 그 나(ME)와 사귄다면, 그것은 마지에게 있어서 파국이 될 것인데 왜 냐하면 그녀는 연기자, 즉 갈아치울 수 있는 인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나(Me)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그러나 또한 치명적인-마지의 분노와 자기혐오가 환생하는, 일종의 로렐라이였다. 그래서 내(me)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할 때, 마지 돌아와요! 하고 소리쳐 재빨리 그녀를 깨어나게 하였다.
마지를 위해 그녀의 경쟁자인 또다른 그녀를 희생시키기로 하였으며8, 조금씩 조금씩 마지에게 먹혀들어가게 하였다. 마지에게 그걸 먹히게 하는 기법은 한 가지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마지, 그녀가 여기 있다면 그녀(me)가 뭐라고 할까요?"
당신 내담자의 가장 나쁜 적과 로맨스를 가져라. 그리고 나서, 그 적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확실해지면, 당신 내담에게 가하는 공격을 중화시키는 데 그 애정을 활용하라.
여러 해에 걸쳐 나는 치료자의 과업이 내담자가 원형(archeological)을 파헤치도록 협력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치료자는 과거를 조사해서 내담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사랑스럽게 현재에 함께 있음으로써 돕는 것이다. 즉, 신뢰롭고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들이 지금 함께 하는 작업이 궁극적으로 구원이 되고 치유가 되리라는 것을 믿음으로써 돕는 것이다.
10. 꿈꾼 자를 찾아서 In search of the dreamer
난 마빈이 이 문제들을 탐색하기를 바라지만, 마빈과 필리스가 세운 결혼관계의 평형상태가 흔들려서 마빈이 치료에서 빠져나가지 않을 만큼만 그리고 또 죽음에 대한 불안을 더이상 자극하지 않을 만큼만이었다. 또 마빈의 편두통이 심해지지 않도록 너무 깊지 않을 만큼만 파고 들어가 탐색하기로 했다.
때때로 꿈들은, 처음 것처럼 존재론적 불안에 대한 공포를 표현하기도 했고, 때로 치료에 나올 것들에 대한 전조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마빈이 내게 조심스럽게 말하려는 것을 생생하게 번역해주는 치료에의 소제목이기도 했다.
이 자료들이 펼쳐지면서 마빈의 현재 문제들을 세 개의 각기 다른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실존적인 입장(existential)에서는 삶의 초석이 되는 시기에 야기된 근원적인 불안, 프로이드 학파적인 입장(the Freudian)에서는 원초적인 재안에 대한 불안이 합쳐져 성적 행위에 대한 불안으로 귀결되는 외디프스적 불안, 그리고 의사소통 관계론적 입장(the communicational) 에서는 부부간 역동의 균형이 최근의 생활 사건으로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이제 삶의 실존적 사실에 눈을 떴고,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사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구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알아가는 데에 열심이었으나 그 열정은 곧 강한 후회감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그는 자기 과거오 ㅏ다가오는 상실감에 슬퍼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 삶 속에 비어버린 공간이 너무 크다는 것 때문에 슬퍼했다. 즉, 자기 속에 있는 써보지 못한 잠재력, 가져보지 못한 자식, 제대로 알 수 ㅇ벗었던 아버지... 돈을 모으는 것보다 훨씬 중여한 것을 담고 있었을는지도 모르는 삶의 과제들 같은 것들이 텅 비어있었다.
그는 자각이라는 열린 수문 밖으로 내던져졌고,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는 홍수 속에 삼켜져 버렸다.
치료로 인해 결혼에 긴장감이 생기는 것은 흔한 일이다. 즉, 내담자는 변화하고 있는데 배우자는 같은 위치에 머물러 꼭꼭 잠그고 있다면, 결혼관계의 역동적 평형상태(equilibrium)는 종종 깨지게 된다. 내담자가 성장을 그만두거나, 성장하여 그 연합을 위험하게 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
광장공포증_ 역설(paradox) 두시간마다 그녀에게 정확히 이렇게 하라고, "집밖으로 나가지 말아줘. 난 당신이 항상 거기 있어서 나를 돌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니까 내가 공포에 떨지 않게 해 줘."
치료적 토대가 공고하고 처방된 행동이 증상의 의미를 깨뜨릴 수 있는 경우, 역설은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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