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는 정신과 의사 Vitor E. Frankl이 아우슈비츠 등의 강제수용소에서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적은 저서이다. 책의 내용은 제1부에서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을, 제2부에서 ‘간략하게 본 로고테라피’, 제 3부에서 ‘1984판에 부친 후기 비극적 낙관론의 사례’로 이루어져있다. 다시 말해, 1부에서는 모진 운명을 견뎌낸 저자의 체험담과 그 곳에서 찾아낸 의미, 2·3부에서는 로고테라피의 기본개념과 치료 사례들을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먼저 1부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에서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다룬다. 하지만 단순한 사실이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러 끔찍한 일들을 생생하게 전달하려는 것이 아닌,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생활이 평범한 죄수의 마음속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라는 질문에 대답하려하고 있다.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정신적 반응을 3단계로 나눈다. 수감자들의 첫 번째의 반응은 ‘충격’이다. 자신의 모든 것들을 잃고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서 새로이 삶을 시작함에 있어 그들의 충격은 극히 정상적이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수감자들에게 찾아오는 두 번째는 반응은 ‘냉담’으로서 그들은 모든 것에 무감각해진다. ‘냉담’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필수적인 자기 방위기제였을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살고 그들이 해방이 된 후 자유로운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을 때의 상황, ‘해방된 죄수들의 심리’를 세 번째 반응으로 다루고 있다.
두 번째 반응으로서 냉담은 방어적인 기제로서의 역할도 있었지만 여러 다른 요인들의 결과이기도 하다. 신체적 원인으로서 굶주림과 수면보족 또한 냉담의 큰 요인이었으며 짜증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정신적 원인으로서는 일종의 콤플렉스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한다. 모두 과거에는 아니면 적어도 한때는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했기 때문에 지금은 전혀 보잘것없는 사람,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 취급이 된 것에 대해 죄수들 대다수는 열등감에 시달린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 지닌 내적 가치에 대한 의식은 보다 높고 보다 나은 정신적인 것에 닻을 내리고 있으며, 그것은 수용소 생활 따위로는 흔들릴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이란 수많은 조건과 환경 요인들의 산물이 아니다. 주어진 환경에 대처해서 행동하고 반응을 나타 낼 정신적 자유가 분명히 있다. 즉, 인간은 행동의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빅터 프랭클은 냉담은 극복될 수 있고, 짜증은 억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어떠한 환경에 놓이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기 자신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수용소에서는 언제나 ‘선택’을 해야 한다. 여기서의 선택이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내적 자유를 우리들에게서 빼앗겠다고 위협하는 폭력에 복종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죄수들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해버릴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들의 도덕적, 정신적 자아에 있어서 마음의 피난처가 붕괴되도록 내버려둔 사람들만이 수용소의 타락한 권세에 희생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마음의 피난처를 만들 수 있으며, 또한 무엇 때문에 만들어야 했을까.
우선 수용소에 있어 가장 괴로운 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에 갇혀 있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즉, ‘기한을 알 수 없는 잠정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미래의 어떠한 목표도 찾을 수 없다고 하여 자신이 퇴행하는 것을 내버려두는 사람은 과거를 회고하는 데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가 실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수용소 생활을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 자신이 참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회들을 지나쳐 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잠정적 존재를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죄수들에게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빼앗은 중요한 요인이다. 자신이 실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견디기 힘든 외적 상황이야말로 인간에게 자신을 뛰어넘어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게 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죄수는 파멸되고,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면서 정신력까지도 함께 잃어버린다. 그런 이들은 퇴행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쇠퇴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느냐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를 알고 일어서는 것이다. 즉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죄수들에게 앞날을 생각할 수 있도록 제시해 줌으로써 정신력을 길러주는 데에 초점을 맞춰야한다.
3단계의 반응으로 해방된 죄수들의 심리에 대해 말한다. 해방된 죄수들의 심리는 우선 자아감 상실로 나타난다. 또한 보다 원초적 본성을 지닌 사람들은 수용소 생활에서 보고 배운 잔인무도한 행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자유로워지자, 그들은 자기의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무자비하게 휘둘러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신적 압박에서 갑자기 풀려난 데에서 생긴 도덕적 결함 말고도, 죄수가 이전의 생활로 돌아갔을 때 맛보게 된 비통함과 환멸로 석방된 죄수의 성격을 손상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더 자극제가 되어 용기를 잃지 않고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해나가도록 돕는 것이 정신의학자로서의 역할일 것이라고 빅터프랭클은 말하고 있다.
제 2부에서는 로고테라피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로고 테라피에서 로고스(logos)는 의미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이다. 로고 테라피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에 중점을 두고 있고,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에 대해 설명한다. 현대 많은 사람들이 실존적 공허를 겪고 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만 삶에 대답할 수 있으며,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대답할 수 있다. 이처럼 로고테라피는 책임을 지는 데에서 존재의 참된 본질을 찾는다. 또한 테크닉으로서 과잉투사에서 역투사로 전환시키도록 한다. 즉 역설적 의도가 작용하면서 환자가 신경증적 증세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제 3부에서는 비극적 낙관론에 대해서 설명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비극적 낙관론이란 비극에 직면해서 가지는 낙관주의이다. 또한 다음 세 가지를 항상 최상의 상태로 고려하는 관점에서 보는 낙관주의이다. 첫째,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 및 실현으로 바꾸기. 둘째,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보다 낫게 변화시킬 기회를 이끌어 내기. 셋째, 삶의 일과성으로부터 책임 있는 행동을 취할 동기를 이끌어내기 이다. 결국 비극적 낙관론에서의 설명 또한 가장 비참한 상황일지라도 삶이란 잠재적으로 의미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수용소에서의 삶을 살았다면?’ 이란 의문을 가지고 글을 읽어 내려갔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나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갔을까 아니면 지레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의 삶의 의미조차 놓아버렸을까. 어떻게 보면 이보다 덜한 상황에서조차,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나는 스스로를 수많은 조건과 환경의 산물로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나의 ‘사명’에 대해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사명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과 내가 살아가는 ‘목적’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내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것인지를 분명히 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일 나의 사명선언서를 읽고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 나의 삶에서 조차 어느 순간 나의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찾아가기를 포기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내가 누구이며, 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인지 생각하는 것조차 놓아버릴 때도 있었다. 어쩌면 ‘기한을 알 수 없는 잠정적 존재’로 여기고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지금 현재를 의미 있게 살아가는 자세, 쉽지는 않지만 이것이 분명해질 때 그 삶이 달라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수능 후 비일비재한 자살 사건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삶의 의미란 그저 대학에 가는 것이 전부이다. 어느 누구도 이 아이들에게 자신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도록 돕지 않는다. 이 책에 소개된 한 죄수의 이야기, 어느 날 꿈을 꾸고 특정한 날에 이곳에서 해방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날이 되도록 어떠한 변화도 없자 그 날 세상을 떠나게 된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수능 날이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을 하니 그 날이 다가오고, 그 날이 끝이 났을 때 자신들의 의미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더 이상 꿈꿀 수 없고 더 이상 희망이 없기에 그들은 삶을 마감하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의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닉부이치치 씨와 이지선 씨이다. 두 사람 모두 고통스럽고 견뎌내기 어려운 상황가운데 처해있었다는 점이 같다. 닉부이치치씨는 태어날 때부터 사지가 없이 발가락 2개로만 삶을 살아야 했다. 이지선 씨는 교통사고로 온몸 55%의 화상을 입고 예전의 얼굴을 잃었다. 이를 보아 빅터 프랭클이 주장하는 바대로 우리는 그저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기만 하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들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현재에 실재하는 삶을 살았다. 자신이 참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회들을 지나쳐 버리지 않은 것이다. 이들의 삶이 바로 닥터 프랭클이 말한 비극적 낙관론, 즉 인간에게 존재하는 온갖 비극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삶에 예스라고 말하는 것을 실현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어떠한 사람도 살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모든 이들은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알기를 포기해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포기해버린다. 자신의 삶에서 삶의 이유를 찾게 하는 것,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는 것, 이러한 의미 추구가 우리 가운데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너무나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이 그들의 의미의 전부가 되어버린다면 수능 후의 자살은 계속해서 불가피할 것이다. 진정한 자신들의 의미를 추구하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삶이 잠재적으로 의미가 있음을 알고 살아갈 때 그들은 실제로 실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빅터 프랭클이 책에서 계속 인용한 니체의 말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참고 견딜 수 있다.’처럼 말이다.
두 번째로, ‘선택’과 ‘책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수용소 재소자들은 어떤 일이든 간에 결정을 내리거나 앞장서서 무얼 한다거나 하는 것은 으레 피했다고 한다. 운명이 자기의 주인이며,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사람이 운명을 좌우하려 해서는 안 되고, 운명이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무엇을 결정하느냐에 따라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으므로 분명한 결단을 내려야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죄수들은 오히려 운명에 내맡기기를 좋아하고 또 그렇게 한 것이다.
어리석어 보이지만 이러한 점이 어쩌면 나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운명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 자신이 나의 주인이기를 선택할 때 나는 그 모든 책임을 져야한다. 그래서 선택하기를 포기하고 운명에 내맡겨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책임을 다른 곳으로 전가하고 싶은 것이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피할 수만도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다시 책을 읽으며 의문이 생겼다. ‘테헤라의 사신’ 이야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부유하고 권세 있는 페르시아 인이 어느 날 하인을 데리고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 하인이 갑자기 지금 막 사신과 마주쳤는데 자기를 협박한다고 외쳤다. 그리고는 서둘러 말을 타고 달아나 오늘밤 안으로 테헤란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니, 가장 빠른 말 한 필만 달라고 주인에게 애원하였다. 주인은 허락하고 하인은 말을 타고 달려갔는데 집에 돌아온 주인이 집에서 사신을 만났다. 어째서 하인을 놀라게 하고 위협했냐고 물으니, 사신이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그를 위협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오늘 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워놓았는데 아직도 그가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랐을 뿐이지.”
처음에 이 내용을 읽을 때는 굉장히 흥미롭고 감명 깊게만 다가왔는데 다시 책을 읽고 정리하다보니 빅터 프랭클이 주장하는 바와 맞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는 수용소에서의 어떠한 선택에 있어 일부 죄수들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결국은 자기들의 운명을 재촉할 뿐이었음을 시사했던 설명이었다. 운명에 우리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을 지고 선택해야한다는 것, 인간의 내적 가치는 환경에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점 등에서 테헤란의 사신 이야기는 이와 상반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고 이해하면서 스스로 다시 재정리하게 되었다. 우선 첫 번 째로 우리는 환경과 운명을 바꿀 수 있지 않다. 빅터 프랭클도 환경을 바꾸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알 수 없을뿐더러, 나의 선택이 죽음의 길인지 삶의 길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여기서의 초점은 환경과 운명에 있지 않다. 초점은 바로 나 자신, 나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나는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이냐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내가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가 주목해서 보아야할 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어떠한 선택은 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에서 나오게 된다. 설령 그 결과가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의미를 두고 있는 가치 안에서 선택된 것이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 죽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나의 의미를 추구하고 나가는 것이다. 꼭 결과가 죽음이 아닐 수도 있다. 더 좋은 것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운명의 사신은 어떻게 어디서 찾아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과 운명의 장난이 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의 선택을 통해 내가 나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는지, 가치 있게 이루어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끝으로, 『죽음의 수용소』를 읽고 이 내용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넘어서 실제 삶으로 이것이 이어지기를 원한다. 지금 처한 상황과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그 의미 추구를 끝가지 포기 하지 않으며 현재에 실재하여 살아가는 그 삶이 내 안에서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 날마다 나의 의미를 되새기며 매일의 피드백을 통해 오늘 하루 진정으로 그렇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나의 의미는 단순한 성공에 있지 않으니 환경에 매여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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